직능대표성 상실...사회 약자 대변 미약

꼼수 창구로 전락한 비례대표, 언제까지 이대로 둘텐가
정의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총사퇴' 투표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

 

정의당 이은주 비상대책위원장과 의원들이 지난 5일 오전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당원 총투표 관련 의원단 합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은주 비상대책위원장, 장혜영, 류호정, 강은미, 배진교 의원. 사진=연합뉴스
정의당 이은주 비상대책위원장과 의원들이 지난 5일 오전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당원 총투표 관련 의원단 합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은주 비상대책위원장, 장혜영, 류호정, 강은미, 배진교 의원. 사진=연합뉴스

2020년 우리는 ‘비례대표용 정당’을 둘러싼 여야의 낯뜨거운 정치쇼를 지켜봤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이 비례대표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만들자 ‘꼼수’라며 크게 반발했다. 민주당은 미래한국당을 향해 ‘쓰레기 정당’이니 ‘의석 도둑질’이니 하며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미래한국당이 범여권보다 더 많은 비례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자 입장을 180도 바꿔 부랴부랴 비례대표용 정당 창당에 나섰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만든 비례정당은 군소 야당까지 참여하는 연합정당인 만큼 미래통합당의 비례 위성정당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연합한 대상은 자력 생존이 불투명한 ‘선거용 떴다방’이라는 소리를 듣는 급조 정당이었다.

이 같은 ‘편법정당’ 경쟁은 민주당이 범여권 군소 야당들과 함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전신)을 배제한 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한 데서 비롯됐다. 개정 선거법은 정치개혁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범여권의 과반 의석 확보 등을 겨냥한 정치공학의 산물이었다. 결국 야당은 이를 역이용해 비례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허를 찔린 민주당은 어렵사리 바꾼 선거법을 스스로 무력화시키며 ’꼼수정당‘을 만들게 된 것이다.

’비례정당 흑역사‘는 국민적 분노를 샀고 정치적 냉소는 극에 달했다. ‘비례 트라우마’는 지금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비례대표 의존도가 높은 정의당이 그 한복판에 있다.

정의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5명 전원에 대한 사퇴 권고안이  지난 4일 당원총투표에서 찬성 40.75%, 반대 59.25%로 부결됐다. 비례대표 의원들에게 사퇴를 권고하기 위해 당원총투표를 실시한 것은 우리 정당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비례대표 의원이 언제부터 비호감 정치의 대명사가 되었나. 수치감을 느껴야 할 이들은 정의당 사람들만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비례대표 국회의원 47명 모두의 몫이다. 그들은 시위소찬(尸位素餐)의 혐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정의당은 지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당의 단골 대선 후보인 심상정 의원은 이번에도 대선에 나섰지만 2.37%를 얻어 자신이 5년 전 얻은 득표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지방선거에서도 광역·기초의원 9명만 당선됐다. 진보정당의 대표성마저 의심케 하는 초라한 성적표다.

심 의원은 2020년 당 대표 시절 음주운전 전력 등 비례대표 후보 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롤(LOL‧리그 오브 레전드) ‘대리게임’ 논란에 휩싸인 류호정 비례대표 후보에 대해서는 청년 정치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부여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정의당의 정의에 대한 원칙과 기준은 무엇인가. ‘정의당에 정의가 없다’는 세간의 수근거림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정의당은 국회의원 6명 중 5명이 비례대표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당이 ‘비호감 으뜸정당’으로 전락한 책임을 비례대표 의원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정의당은 비례대표에 관한 한 어느 정당보다도 짙은 어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당이라는 사실이다. 정의당의 전신인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은 우리 정당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정치 스캔들이다. 대리ㆍ중복투표 등의 혐의로 462명이 사법처리됐다. 이보다 더 헌법 정신을 훼손하고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유린한 일이 또 있을까.

정의당은 2012년 창당 후 줄곧 선거제 개편 등을 통한 비례대표 의석 확대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민주당과 함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가 21대 총선 국면에서 민주당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이 등장하면서 ‘낭패’를 맞은 것은 그 극명한 사례다.

정의당은 이제라도 ‘비례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류호정 의원은 최근 수행비서 면직 사건으로 ‘해고 갑질’ 논란을 빚으며 또 나쁜 의미로 주목을 받았다. ‘비례의원 사퇴’ 개표를 앞두고는 스스로를 ‘낯선 정치인’, ‘시끄러운 존재’로 자리매김하며 왜 그러한 존재로서 정치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득했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름지기 정치는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세상을 시끄럽지 않게 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관종 정치’는 타기해야 마땅하다. ‘만용의 정치’는 위험하다.

비례대표 국회위원 제도의 기본 취지를 돌아볼 때다. 범박하게 말해 비례대표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직능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국민은 비례대표 의원이 되는 과정과 절차부터 미덥지 않게 생각한다. 비례대표 공천이 정의의 원칙아래 이뤄지고 있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비례대표 의원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기능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비례대표제의 존폐 여부도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비례대표를 지역구 의원으로 가기 위한 단단한 돌층계 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관련 국민 인식 조사에서 유권자의 69.8%가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응답한 사례도 있다. 비례대표제도가 다양한 정당들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의견이 다수다.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비례대표제가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존립 기반마저 잃어가고 있다. 비례대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형해화돼가는 비례대표제, 제 구실 못하는 ‘국회의원 아닌 국회의원’을 언제까지 두고만 볼텐가.

[시사경제신문=김종면 주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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