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의 미학’ 화두로 또 다른 한국미의 전형 창조
 ‘다문화 꿈토링스쿨’ 운영...패션멘토로 후학 양성 

이상봉디자이너(좌측)와 시사경제신문 정영수 대표가 인터뷰 직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임종희 기자
이상봉디자이너(좌측)와 시사경제신문 정영수 대표가 인터뷰 직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임종희 기자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 말은 독일 철학자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서 인용해 더욱 유명해진 말이다. 헤겔은 이것을 조금 변형해 이렇게 썼다. ‘여기에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추어라’

이 문구는 고대 그리스의 한 육상선수가 로도스섬에서 자신이 올림픽 선수처럼 잘 뛰었다고 허풍을 떨자, 이를 지켜보던 다른 이가 그러면 여기를 로도스섬으로 생각하고 실력을 발휘해 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핑계를 대거나 상황을 탓하지 말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의 계기를 포착하고 그것을 선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끝없는 도전을 통해 K-패션 대표주자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한글 캐릭터, 태극 문양, 단청 등 한국의 미를 창작의 모티브로 삼아 40년이 넘는 패션인생의 업(業)을 쌓았다. 그는 단순하게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상투적인 구호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창의성을 발휘해 인류 보편의 가치를 획득함으로써 세계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이상봉’ 본사에서 그를 만나 여전히 식지 않은 패션의 열정과 꿈,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23ss쇼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이상봉 부띠끄
23ss쇼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이상봉 부띠끄

디자이너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패션은 마라톤과 같은 인내와 끈기의 산물  

“제가 처음부터 디자이너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닙니다. 서울예술대학 학생 시절에는 연극에 빠져 지냈어요. 그런데 군입대 후 사흘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세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죠. 결국 연극에 대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정이 허기를 대신해 줄 수는 없으니까요”

“연극 연습이 끝나고 밤 10시 넘어 집으로 가는 데 그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수선집이 있는 거예요. 그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죠. 낮에 연극을 하고 밤에는 재봉일을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생계도 꾸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 길로 광고에서 본 국제복장학원에 등록을 하고 2년 간 이른바 ‘패션’을 공부했습니다”

1983년 당시 최고의 패션디자인대회이자 신인 등용문인 중앙디자인 콘테스트에 입상하면서 패션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섰고 결국 연극이 아닌 패션디자인으로 일가를 이뤘다. 그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 만큼이나 그의 패션작업에는 극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건축ㆍ회화ㆍ조각이 공간예술이라면, 문학ㆍ음악ㆍ연극은 시간예술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공간의 예술인가 시간의 예술인가. 연극에 애정이 많은 이상봉은 디자인의 시간성을 유독 강조한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시간의 싸움입니다.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은 그걸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시즌’이라는 게 있잖아요. 정해진 시간에 작품을 발표하고 옷이 나와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30%가 됐든 절반이 됐든 다 재고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시간에 쫓기면 날밤새기 일쑤죠”

최근 들어 그가 디자인적 상상력, 나아가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주목하는 것이 돌이다. 예술가 특유의 감성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돌의 미학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그는 돌이라는 자연의 물상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시원으로 돌아가려 하는 듯하다.

“그동안 돌을 테마로 네 번 정도 작업을 했어요. 돌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습니다” 최근 ‘돌, 생명과 우주’를 주제로 열린 2023 S/S 서울패션위크 패션쇼에서도 그는 돌을 매개로 한 작가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돌에서 찾아낸 생명의 경이와 우주적 아름다움의 근원을 특유의 예술적 이미지로 구현해 냈다.

이상봉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다. 하지만 그의 감수성은 사뭇 자연친화 적이다. 돌의 생명, 혹은 생명의 돌에서 예술적 영감의 샘물을 길어 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속 가능한 친환경 패션에 방점을 둔 그의 새로운 작품들이 또 다른 한국미의 전형을 보여주는 ‘코리안 쿠튀르(couture)’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그가 천착(穿鑿)하는 패션의 화두는 요컨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 도저한 형이상(形而上)의 정신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2022년 9월 파리에서 23ss 시즌 쇼 화보 촬영 모습. 사진=이상봉 부띠끄
2022년 9월 파리에서 23ss 시즌 쇼 화보 촬영 모습. 사진=이상봉 부띠끄

요즘 패션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감각과 재능이 뛰어나다 
   그러나 ‘절박함·승부욕·도전정신’이 부족하다

이런 인본주의적 패션 철학은 그의 ‘교육봉사’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요즘 패션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보면 정말 감각과 재능이 뛰어나요. 그런데 절박함이 없다고 할까. 막다른 길에서도 끝내 이루고 말겠다는 승부욕, 도전정신 같은 것이 부족한 것 같아요. 재능 있는 친구들이 난관에 봉착해 다른 길을 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패션디자이너로서의 기본 자세를 강조하며 그는 자신의 ‘패션 수난사’를 들려줬다.

“저는 패션인생 42년차입니다. 기성복을 좀 하다가 ‘이상봉’이라는 제 브랜드를 갖게 된 것이 서른일곱 살 때죠. 과거 우리 선배들은 브랜드에 자기 이름 넣기를 꺼려했어요. 앙드레 김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한 첫 사례일 겁니다”

이상봉 브랜드의 성장사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그의 이름이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였다. 1997년 영국 런던에서 열기로 한 패션쇼가 IMF 사태로 무산되면서 그의 해외 진출 꿈은 좌절됐다. 하지만 그는 이 위기를 겪으며 신문을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고 우리 사회의 빛과 어둠을 인식하게 됐다. 신문으로 옷을 만들고, 장승으로 무대를 꾸미고, 모델이 신발을 벗어들고 퇴장하는 ‘죽음의 연기’를 하는 등 연희적 성격이 짙은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도 그 때 일이다.

그러나 시련은 그의 도전정신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됐다. “해외에서 패션쇼를 할 수 없다면 옷이라도 팔러 가자고 마음 먹었죠. 그래서 가게 된 것이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입니다. 당시 그곳에 한국브랜드는 몇 개 없었어요. 심지어 전시관에 브랜드 플래그와 함께 국기가 게양되는 데 태극기가 아닌 북한 인공기가 내걸릴 정도로 당시 한국은 ‘패션 불모지’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패션산업은 주변부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우리의 강점인 정보기술(IT)을 비롯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메타 패션 등 다양한 첨단 경로를 통해 세계 5대 패션강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아시아모델 어워즈의 톱모델들과 함께 서울패션위크 행사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이상봉 부띠끄
아시아모델 어워즈의 톱모델들과 함께 서울패션위크 행사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이상봉 부띠끄

패션디자이너의 덕목은 도전정신과 창의적 사고다

“디자인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업인으로서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디자이너의 첫째 덕목은 도전정신과 창의적 사고입니다. 디자인은 마라톤과도 같은 것입니다.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틈날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지속가능성입니다.” 패션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말하는 그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청신한 감각이다.

요즘 그의 삶의 무게추는 패션교육자로서의 활동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다. 패션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의 꿈을 디자인하고 응원하는 ‘희망의 멘토’로 나섰다. 재작년부터 ‘다문화 꿈토링스쿨’ 교장을 맡아 서울시교육청 관내 초‧중‧고 다문화 학생들을 대상으로 패션디자인과 모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을 때 하자’는 자세로 지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제가 다문화 이슈에 관심을 기울인지 10년이 훨씬 넘었어요. 제 고향이 신대방동이에요. 서울에서 다문화 역사가 가장 깊은 곳 중 하나죠”

새롭게 열린 2023년 새해, 이상봉의 패션 지도는 어떤 그림을 그려갈까.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시도한다”는 나폴레옹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는 그는 필경 또 새로운 도전에 나설 것이다. 그는 나이를 잊었다, 아니 나이를 버렸다. 이상봉 브랜드 탄생 이후 ‘만년 37세’ 청년을 고집하는 그에게서 노성한 장인의 혼이 묻어난다.

[시사경제신문=김종면 주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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