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제74주기 추모식 거행

26일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74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6일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74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백범 김구 선생 제74주기 추모식이 26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취재에 따르면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주관으로 열린 추모식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이종찬 광복회장,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 김형오 전 국회의장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추모사에서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라며 "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세력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을 옹호하는 극좌파 친북 이적 집단이거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고의로 폄하하고 왜곡하는 소위 극우세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많은 이들이 백범 선생께서 주장한 분단 없는 평화통일을 곡해하고 있다"며 "선생께서는 자유와 인권이 유린당하더라도 무조건 통일만 바라는 통일지상주의 길을 가신 게 아니라, 한민족이 사상으로 갈라져 죽고 죽이는 상황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선생께서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고 자주독립의 역사를 지향하셨다는 뜻을 우리 후진들에게 교육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고 다짐했다.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은 1894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싸웠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일본인을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포고문을 길거리에 내걸었다.

이후 체포돼 1897년 7월 사형이 확정됐다가 광무황제 특명으로 사형 직전 집행정지령이 내려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준·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운동을 이끌었다.

1908년 독립지사들의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 공모 혐의를 받아 다시 투옥됐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선임된 이후 내무총장,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조국 자주독립에 헌신했다.

독립 이후인 1949년 6월 26일 개인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시사경제신문=김우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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