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성의 늪’에 빠진 주 단위 근무시간제 부작용 ‘상상 이상’
정부 규제 아닌 노사 자율로 유연근무 정착, 경제활력 살려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에 나섰다. 핵심 이슈 가운데 하나가 근로시간 개편이다. 주 단위로 묶여있는 52시간 근무제를 월간 단위로 보다 유연하게 바꾸겠다는 것이다. 현행 근로시간은 주당 법정 근로시간 40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더해 주 최대 52시간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연장 근로시간이 월 48시간, 그러니까 주당 12시간에 4주를 곱한 시간 이내라면 특정 주에는 연장근무가 12시간을 넘더라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 

주 52시간제는 무엇보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이다. 주 52시간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노동자의 과로를 막고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같은 제도적 강제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 52시간제 개편은 결국 장시간 저임금 제도를 고착시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반면 기업을 경영하는 측에서는 지나치게 경직된 근로시간제로 말미암아 상황에 따른 적시(適時) 경영이 불가능해 제대로 된 경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초과근무 수당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야간 혹은 일요일에 일하고자 하는 ‘자발적’ 근로 희망자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기도 하다.  

무엇이 선이고 정의인가. 주 52시간제는 기본적으로 가치 판단의 문제다. 단 하나의 정답을 찾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틀 지워진 현재의 주 52시간제 아래에서는 기업 활동이 상당 부분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나무의 뿌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최종 제품에 녹아있어 제조업 경쟁력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주조⸱금형⸱용접 같은 뿌리산업 분야다. 24시간 내내 기계를 돌리다시피 해야 하는 뿌리산업계는 인력 충원을 통한 교대 근무가 불가피한 실정인데 주 52시간제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특정 기간에 업무량이 폭증하는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는 5인 미만으로 인원을 다운사이징하는 ‘기업 쪼개기’까지 성행하는 지경이다. 경제 패권전쟁의 핵심인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  인력 같은 경우만이라도 탄력적으로 근로시간을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는 좀처럼 먹히지 않았다. 

한달간 쓸 수 있는 연장근로 약 52시간(12시간x4.345주)을 몰아서 사용하면 한주에 최대 92시간 노동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이런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노동개악’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그처럼 가혹한 노동이 일선 현장에서 실제로 이뤄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물론 ‘가능성의 영역’에 속한다. 

정부의 주 52시간제 개편 방안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휴식권 보장을 위해 근로자와 사용자가 근로시간을 협의하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업무가 많아 초과근무를 하면 이를 저축해뒀다가 원할 때 쉴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근무일 사이 11시간 연속 휴식’을 보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도 있다. 

노동계에서는 여전히 우리 노동 현실이 열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아직도 연차휴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인데 어떻게 근로시간을 저축할 수 있냐고 볼멘소리를 하는가 하면 낮은 노조 조직률을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노조 조직률은 2020년 기준 14.2%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며, 30명 미만 영세사업장은 0.2%에 그친다. 이런 현실에서 노사합의나 노사자율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도한 노동시간을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국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020년 1927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582시간보다 상당히 많다. 

근로시간은 삶의 질, 노동생산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장시간 근로는 근로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한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를 뜻하는 ‘워라밸’이라는 개념도 생겨났다. 장시간 노동을 줄이고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맞추자는 일종의 문화운동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경영 위기 상황에서도 근로시간을 조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업의 문을 닫으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주 52시간제 유연화가 재계 쪽에 경도된 조처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하지만 이를 ‘편가르기’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단견이다.  

연장근로시간을 주 단위로 강제하고 규제하는 나라는 주요 선진국 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은 연장근로시간을 월간 단위(45시간)나 연간(360시간)으로 관리한다. 독일 등 서구 선진국은 근로시간 문제를 정부 규제가 아닌 노사 자율을 통해 풀어나간다. 미국에는 연장근로 한도가 없다. 

정부가 추진하는 주 52시간제 개편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기간 공약한 노동시간 유연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대통령실은 지난달 25일 공지를 통해 “한 주 12시간 연장근로의 월 단위 전환은 확정된 정부 방침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노동부의 공식 발표 내용이 정부 방침이 아니라는 설명은 불필요한 오해를 낳기에 충분하다.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 여론의 흐름을 주시하는 것은 좋지만 주 52시간제 개편을 포함한 노동개혁의 골든 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초과근로시간 단위 기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법을 개정해야 한다. 여소야대 상황인 만큼 노동계에 대한 설득과 별개로 야당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정부는 노동개혁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주 52시간제 개편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시사경제신문=김종면 주필 ]

저작권자 © 시사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