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아…‘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br/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성경적 효도! [엡6:1~3]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6: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 공경은 영육간의 축복입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요즘 어머니들은 결혼한 자녀들을 이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며느리=좀도둑, 딸=예쁜 도둑, 아들=큰 도둑. 이게 무슨 말일까요? 며느리는 은근히 가져가고, 딸은 예쁘게 가져가고, 아들은 대놓고 가져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할마’, ‘할빠’라는 말입니다. 할마는 ‘할머니+엄마’, 할빠는 ‘할아버지+아빠’로 손주를 키우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맞벌이 부부가 늘다보니 황혼 육아를 하는 부모님들이 많아진 까닭인데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 부모세대는 일평생 쉴 틈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 목사님의 어머니가 소천하셔서 친구 목사님이 조문하며 위로하러 갔습니다. 이때 그 목사님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제일 힘든 것은 내가 더 이상 실수할 사람이 없다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실수하면 사람들이 비난을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수를 실수로 여기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부모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한없이 받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이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성경적 효도를 회복하는 어버이주일을 맞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효도의 개념은 대부분 유교적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잘 드리는 것이 효도인양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자기 위안이고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제사는 영적으로 볼 때 부모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고전 10:20에 보면,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며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악한 영입니다. 결국 인간을 망하게 합니다.
사실 효도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해야지 죽은 부모에게는 아무리 제사를 드려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성경적 효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성경적 효도에 대해 짧지만 핵심적 원리를 일목요연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원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성경적 효도가 무엇인지 분명한 답을 얻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공동체를 이루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주 안에서 순종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 6:1) 사도 바울이 강조한 성경적 효도의 첫 번째 원리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순종은 헬라어로 휘파쿠오라고 하는데 ‘귀를 기울이다’, ‘따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순종이란 부모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순종과 효도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잘 듣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은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잠 23:22),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 21:18~21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성문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여서 악을 제하라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사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았는데 바로 ‘주 안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주님의 관점에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관점과 판단 기준에서 하고 하지 않고를 결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면 이제는 주님의 관점에서 삶의 모든 부분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성경적 신앙생활입니다. 한국의 문화적 배경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고부간 갈등입니다.
이를 두고 생긴 한 우스개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시어머니가 납치를 당했습니다. 납치범은 며느리에게 전화해 협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당신 시어머니를 데리고 있다. 빨리 돈을 보내라.”
그런데 이 며느리는 전혀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지나 납치범들이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몸값을 빨리 보내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시어머니를 즉시 돌려보내겠다.”
그러자 며느리가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계좌번호 알려 주세요. 바로 보내드릴게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문제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결국 서로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어머니 눈에는 며느리가 영 맘에 차지 않고,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어머니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방법이 무엇일까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관점으로 삶의 모든 부분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적 눈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에는 또 다른 영적 의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는 부모님 말씀을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만약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된다면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도하다가 잡혀 왔는데 관원들이 베드로에게 다시는 전도하지 말라고 강요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언제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 부모님이 “예수 믿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거기에 순종하고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가장 큰 불효입니다.
불신 부모가 있으신 분들은 지혜롭게 부모님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면서 부모님이 주께 돌아오도록 평상시 삶을 통해 모든 관계를 회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전 9:18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다 포기하고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될 정도로 자신을 낮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원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이런 생명 살리는 관점을 가지고 부모님을 섬기며 복음 공동체를 이루는 축복 속으로 들어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공경과 축복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엡 6:2) 사도 바울은 성경적 효도의 두 번째 원리가 ‘공경’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공경하다’는 히브리어로 ‘카베드’인데 이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뜻하는 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단순히 존경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공경하며 영광스럽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라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르게 공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어떻게 해 주었느냐에 따라 공경하고 말고를 결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십계명 중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한해 축복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3) 부모를 공경할 때 주어지는 축복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잘되고’란 구약에서는 대부분 물질의 축복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서 물질적 축복보다는 영적 축복의 개념이 더 강조되었습니다. 결국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은 영육간에 형통한 삶의 축복이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 유치부에 다니는 한 아이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무엇인가를 열심히 외우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십계명을 암송하고 있었는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네 부모를 공격하라”고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빠가 아이에게 가만히 알려 주었습니다. “얘야, 공격이 아니라 공경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물었습니다. “아빠! 공격이랑 공경은 어떻게 달라요?”
아빠는 아이에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공경은 아빠 말씀을 잘 듣고 사랑하는 거고, 공격은 어른에게 덤비고 말씀을 안 듣는 거지.” 그러자 아이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빠, 아빠는 왜 할아버지를 공경하지 않고 공격해?”
미국의 심리학자 메리 파이퍼는 “노인에 대한 사랑은 곧 자기 미래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보고 자녀들이 훗날 우리에게 그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부모가 온 효자가 되어야 자식이 반 효자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심느냐에 다라 우리의 미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녀에게 효도를 받자고 그러는 수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여 주는 부모 공경의 모습을 통해 렘넌트들의 삶의 규모가 세워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원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부모 공경을 통해 가정을 성경적으로 세워나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결론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이 외출 후에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을 졸이며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이미 두 눈을 실명한 상태였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히 닫고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청년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청년은 이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느냐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청년은 드디어 붕대를 풀게 되었는데 그러고 나서 앞을 본 순간 청년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한쪽 눈을 빼어 아들에게 준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앞을 못 보게 되는 내가 너에게 짐이 될 것 같아서….”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아 혹시라도 부모와의 관계에 걸림돌이 놓여 있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지금 이 시간 이후 새로운 관계 회복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이 이미 소천하신 분들은 우리 주변에 있는 노인 분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복음적 관계 회복이 일어나 이 땅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증거가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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