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존엄사’ 자발적 선택 저조…법과 현실 괴리

연명치료 심의 위한 의료기관윤리위 확대해야

고령화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이 주목받는 가운데 존엄사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사진은 KBS 화면 캡처.

 

[시사경제신문 김종면 기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6년 동안 서른세 번에 걸친 구강암 수술을 받으면서도 연구저술에 몰두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강력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극심한 고통을 겪은 그에게 의사와 가족은 진통제를 복용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아스피린 이상은 한사코 거부했다. 죽을 때까지 명료한 정신을 잃지 않겠다는 의도에서다.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고 오랫동안 병석에서 시름시름 앓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하나의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몸이 약해지며 정신까지 마비되지 않는 것입니다. 맥베스 왕이 말한 것처럼 갑옷을 입고 죽음을 맞고 싶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맑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진통제를 거부한 프로이트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의 죽음은 그 도저한 정신만큼이나 존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육체적 죽음의 풍경은 더없이 처절하다. 그의 구강은 이미 괴사돼 악취를 풍겼다. 뺨에는 탄환이 관통해 지나간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다. 밤이면 벌레들이 고약한 냄새를 맡고 물려들어 그의 침대는 모기장이 에워쌌다.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던 애완견 '륀'도 프로이트에게서 나는 죽음의 냄새가 두려워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육체가 가는 길이란 결국 병들고 썩어 송장 악취를 풍기는 것, 그런데 품위 있는 죽음이란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프로이트는 “나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생을 마칠 것이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프로이트가 극명하게 보여줬듯 고통을 온전히 견뎌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없다.

프로이트는 육체적 고통 속에 여든세 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진통제를 먹느니 차라리 고통을 견디겠다는 프로이트의 죽음 대응 방식은 과연 정신분석의 대가다운, 인간 정신의 본질에 충실한, 존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이 중요시되는 ‘웰 다잉(Well-dying)’의 시대, 프로이트의 죽음의 방식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을 염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을 병’이 들어 연명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 2월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 일명 존엄사법)'이 시행된 이후 연명의료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망 없는 연명치료 끝에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는 이들이 연간 5만 명에 이른다.

보건복지부와 국가생명윤리정책원에 따르면 연명치료결정제도 시행 후 1년 사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11만 명이 넘어섰고, 3만6000여 명이 연명의료를 유보 또는 중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존엄사를 환자 스스로 결정한 경우는 32.3%에 불과해 연명의료 결정이 대부분 가족에 의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지부는 연명의료 결정에 대한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해 나가고 있다. 지난 3월 28일부터 존엄사법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 결정이 한결 수월해졌다.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던 것을 바꿔 ‘배우자와 1촌 이내 직계 존·비속’의 동의만으로도 연명의료 행위를 중단할 수 있도록 했다. 배우자와 부모, 자녀의 승낙만 얻으면 존엄사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걸림돌은 또 있다. 연명의료를 심의하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돼 있는 곳이 너무 적다. 현행법상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윤리위에서 환자의 사망이 임박했다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복지부에 따르면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에 들어간 지난해 2월 윤리위를 설치한 의료기관은 전체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 3324곳 가운데 59개로 1.8% 수준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연명의료 중단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한 의료기관에 한해서만 결정할 수 있다. 사전연명치료의향서를 작성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병원 환자들이 존엄사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셈이다. 특히 노인 사망률이 높은 요양병원이 연명의료 중단에 필수적인 윤리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하루빨리 시정돼야 한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는 중소병원이나 요양병원은 자체적으로 윤리위를 설치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공용윤리위원회다. 대형병원과 국공립병원 등이 공용윤리위원회를 꾸려 윤리위를 두기 어려운 중소병원 등의 업무를 위탁받아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는 물론 미봉책이다. 윤리위 문제는 의료기관에게만 맡겨둬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연명의료결정제도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는 윤리위 설치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연명치료결정법 시행으로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기초는 마련됐다. 하지만 존엄사를 둘러싼 법과 현실의 괴리는 여전하다. 환자 본인이 사전에 연명치료의향서를 작성해 등록해 놨다가 회복불가 상황에 직면해 연명치료를 중단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본인이 스스로 존엄사를 결정하기보다는 가족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

존엄사를 본인 스스로 내켜하지 않는 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환자의 귀에는 잘 들어올 리 없다. 죽음은 두려움이다. 썩어가는 육체 앞에서 끝내 당당했던 프로이트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죽음은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다.

고령화 시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그만큼 죽음도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로 다가온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연명치료 조건이 완화됐고, 존엄사에 대한 인식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다. 하지만 연명의료 중단에 동의한 유족들은 여전히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극단적인 소리도 간혹 새어나온다.

고령화 시대의 죽음은 이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나서 품격 있는 생의 이별을 도와주고 관리해줘야 하는 시대다. ‘더 나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존엄사법’이 시행된 지 1년이 훨씬 넘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존엄한 죽음’의 심오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서른세 차례나 구강암 수술을 받으면서도 끝내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프로이트의 마지막 순간을 존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주위의 고통을 덜어주는, 어떤 면에서는 이타적이기까지 한 죽음 또한 존엄한 것일 수도 있다.

가치의 문제다. 선택은 열려 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존엄사가 제도화된 이상 우리는 그것이 선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죽음의 인프라'를 깔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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