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생기 불어넣는 것은 결국 문화와 예술

'재생’ 연계 공공미술 프로젝트 실효성 높여야

이것이 공공미술인가. 서울 동작구 상도4동 도시재생 골목길에 낡은 건축물 옹벽을 따라 철제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왼쪽) 오른쪽은 대로변의 한 벽화담장. 사진 김종면 기자

 

[시사경제신문 김종면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포스코센터 앞에는 꽃이 피는 구조물, 아마벨이라는 제목의 거대한 조형물이 놓여있다. 현대미술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이다. 높이가 9미터, 무게가 30톤이나 되는 이 작품은 지난1997년 설치될 당시 적잖은 논란을 낳았다. 예술성 시비와 흉물 논쟁에 휩싸여 철거 위기까지 몰렸다. 이 '문제적' 예술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작품은 꽃이 피는 구조물(Flowering Structure)’이라는 정식 제목보다 아마벨(Amabel)’이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마벨은 스텔라 친구의 딸 이름이다. 친구 딸이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자 스테인리스 스틸에 그 비행기의 잔해를 덧붙여 이 작품을 만들었다. 한낱  고철덩어리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당당히 공공미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포스코의 기업 이미지와 어울린다. 힘차게 피어나는 꽃송이는 강철보다 강한 생명의 기운을 전해준다.  

공공미술(Public Art)은 미술관에서나 감상할 수 있는 특정한 소수를 위한 예술이 아니다. 누구나 거리에서 혹은 광장에서 쉽게 접하고 느낄 수 있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예술이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 소통과 공감이다. 왜 이 작품이어야 하는지, 왜 여기 놓여 있어야 하는지 그 역사·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대중에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공공미술은 감상을 위한 예술을 넘어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최근 공공미술은 도시재생과 결합돼 한층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공공미술의 소임은 단순히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도시 재생의 작업, 그 한가운데에 공공미술이 있다. 도시재생과 공공미술의 행복한 만남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바야흐로 도시재생이 화두다. 천편일률적인  재개발이 아니라 지역 특성을 살린 재생이 강조되는 시대다. 자연히 공공미술의 역할도 커졌다. 이 지점에서 도시재생을 위한 바람직한 공공미술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공미술의 기대효과는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주민과의 공감대를 넓히고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사회 구성원의 생활 속 문화를 미술로 재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시재생과 관련, 우리 공공미술의 현주소는 초라하다. 서울 동작구 상도4골목공원만 해도 그렇다. 지난해 4월 동작구는 상도4동 도시재생 골목길(양녕로 27)이 공공미술을 입힌 골목공원으로 재탄생한다고 밝혔다. 이 길은 2017년 시·구 연계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서울은 미술관공모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1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받았다. 

그 후 이 도시재생 골목길은 어떻게 변했을까. 양녕로 27길은 낡은 건축물 옹벽,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경사지 계단, 활용도 낮은 자투리 땅 등이 널려 있어 민원이 많던 곳이다. 동작구는 격자형 주택지에 남겨진 유선형 복개천 골목길에 공공미술의 개념을 도입했다. 노후한 건축물 옹벽 150m 구간에 높다랗게 철제 울타리를 세우고 덩굴식물이 자라게 한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이런 '공공미술 아닌 공공미술' 하나로 거리경관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도시재생 골목은 미술공원은커녕 재생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공공미술을 접목한 도시재생사업을 한다면서 그동안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공공미술이라 불릴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낡은 도시에 공공미술을 접목하고 거기다 또 이야기를 입힐 때 비로소 도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세계적인 도시재생 사업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영국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다. 원래 화력발전소였던 이곳은 미술관으로 변신해 오늘날 세계 현대미술을 주도하고 있다. 데이트 모던에는 지금도 옛 발전소의 모습이 남아 있다. 발전소는 퇴락해 사라졌지만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려는 정신은 곳곳에 살아 있다.

공공미술을 통한 도시재생을 꿈꾼다면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부터 배워야 한다. 지역 고유의 특성과 정체성을 살리려는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도시재생을 위한 공공미술이 고작 마을 벽화 그리기수준에 머문다면 유감이다.

2016년 발생한 서울 이화마을 벽화 훼손 사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화 벽화마을을 상징하는 벽화 해바라기 계단잉어 계단이 주민에 의해 손상된 이 사건은 결국 개발에 따른 주민 간 이해 충돌과 무관치 않다. 이화 벽화마을은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낙산공공미술프로젝트라는 공공미술 시범사업을 계기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마을이 활성화되고 관광객이 몰리자 소음과 불편으로 지역사회에 갈등이 생기고 마침내 재개발도 무산됐다. 공공미술의 역습이라고 할까. 이 벽화마을에는 사람들의 발길도 줄었다.

우리나라의 공공미술 역사는 미국·프랑스 등 공공미술 선진국에 비해 일천하다. 국내 공공미술의 역사를 간략히 요약하면 1970년대 상징 조형물로 시작해 1980년대 도시미화 차원의 모더니즘 조각의 등장을 거쳐 1990년대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공공미술과 건축물 미술장식제도의무화, 2000년대 대규모 공공미술 사업으로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건축물 미술장식제도는 의무 적용에 따른 폐단이 생기자 건축물 미술작품제도로 바뀌었다.

오늘날 공공미술은 도시의 광장, 공원, 건물, 대중교통시설 등 다양하게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도시재생을 위한 공공미술은 주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벽화와 설치작품이 주를 이루는 만큼 한계가 있다. 

조형미술로 대표되는 공공미술은 전시장에 있는 작품을 공공의 공간에 옮겨 놓는다고 임무를 완수하는 게 아니다. 퍼블릭 아트는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적당한 곳에 그냥 털썩 떨어뜨려 놓는 플롭 아트(Plop Art)’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공미술은 모름지기 환경과 어울려야 한다.

우리에게 공공미술은 여전히 낯선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광화문 흥국생명 건물  앞에는 세계에 몇 개밖에 없는 미국 작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라는 작품이 서 있다. 높이가 22미터나 되는, 사뭇 위압적인 조형물이다. 그런가 하면 청계광장 초입에는 미국 팝아트 작가 클래스 올덴버그의 작품 스프링(Spring)’이 놓여 있다. 엄청난 예산이 들어간 공공미술품들이다. 우리가 공공미술 투자에 그리 인색하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끊임없이 팔을 올렸다 내리는 '망치인간'의 고단한 모습을 보며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한 송이 거대한 꽃으로 피어나는 '아마벨'을 바라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낄까.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노동은 신성하다! 생명은 약동한다!

공공미술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그 가치를 알고 있다. 그러나 도시재생과 관련한 공공미술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벽화마을들기' 수준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기본적인 이해 자체가 부족하다. 서울시와 자치구, 예술인, 그리고 지역 주민이 도시재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상호 협의를 통해 작품 기획만 잘 해도 우리 공공미술은 한결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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