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원내대표 국가원수 모독 논란…보수 품격 ‘실종’
정치선동 아닌 국정현안 비판·대안 제시의 장 돼야

 

김종면 논설위원.

[시사경제신문 김종면 기자] 사자의 마음과 독수리의 눈, 그리고 여성의 손길. 훌륭한 의사가 갖춰야 할 조건이다. 모름지기 의사는 환자를 위해서라면 사자처럼 용감해야 한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녀야 한다. 때로는 여성적인 섬세함도 필요하다. 이는 비단 의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정치인 또한 나라의 환부를 다스리는 ‘사회의 의사’라고 한다면, 그들 역시 담대한 정신과 사물을 꿰뚫는 형안, 국민의 아픔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배려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갑갑하기 짝이 없다. 막말과 저주의 정치가 판친다. 대의명분 없는 정치행위는 아무리 용감하다 해도 ‘만용’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청맹과니’에 불과하다. 국민 눈높이와 거리가 먼 섬세한 정치란 있을 수 없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어제(1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 지난해 9월 블룸버그 통신이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에서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top spokesman)이 됐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 이미 알려진 얘기인 만큼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외신의 ‘책임 없는’ 지적과 제1야당 원내대표의 ‘책임 있는’ 발언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인용 형식의 간접화법은 차라리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야당으로서 정부의 대북정책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정치선동적 접근이 아니라 북핵문제의 당사자이자 북미회담에 있어서는 ‘제3자’적 입장이기도 한 우리로서 어떻게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인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 원내대표는 연설에서 ‘좌파’라는 표현을 열 번 이상 사용하며 색깔론 공세를 폈다. 이념의 망령이 여전히 활개 치는 이 ‘냉전 아닌 냉전’의 섬에서 그 같은 발언은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철지난 ‘투사 코스프레’로 극우세력의 눈에 든다고 참다운 리더십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중도보수 혹은 개혁보수, 그러니까 합리적 보수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아니 얻어서도 안 된다.

반면 오늘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다. 정치적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데 초점을 맞춘 듯한 한국당의 대표연설과는 달리 민생개혁 입법에 방점이 찍힌 점이 눈에 띈다.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 미세먼지 대응을 위한 범국가적 대책기구 설립, 자살예방을 위한 5개년 계획, 저출산 인지 예산안 편성, 미투 입법 등 민생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모두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한 것들이다.

한반도 평화문제에 대한 바른당의 입장은 한국당의 그것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김 원내대표는 “대북 정책에 대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큰 방향에서는 옳다”며 “정부와 여당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집해 상황을 판단하는 ‘확증편향’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나 한반도 평화 문제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며 보수세력도 정부의 노력에 초당적으로 협력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주요 국정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정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자리다. 여야 정치투쟁의 무대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회무용론’에 이어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무용론’까지 나올 지경이다.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과거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도록 할 책무는 보수, 진보 모두에게 있다.

보수를 내부로부터 좀먹게 하는 ‘보수의 적’이 넘쳐난다. ‘보수의 원조’로 불리는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자신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에서 보수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보수는 혁명을 반대하는 것이지 개혁과 쇄신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쇄신만이 보수를 보수답게 만든다” 그렇다. 지금 보수정치권에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보수를 보수답게 혁신하는 것이다.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정치선동의 장으로 삼으려는 유혹을 받는 것만으로도 보수의 자격이 없다. 보수야말로 ‘품격’을 먹고 사는 존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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