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황토종합건설 이준호 대표.

어려운 가정환경 극복하고 자수성가
40년 넘는 세월 오로지 건축업에 몸담아
 ‘부도’라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삶의 의미 깨달아

서민 주택복지, ‘부동산 정책의 이원화’ 추진 호소
 ‘더불어 사는 건강한 사회’ 만들기 동참

이 황토종합건설 이준호 대표는 천생 건축장이다. 

60대 초반을 넘긴 지금까지 집 짓는 일 외에는 눈을 돌린 적이 없다. 그는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혹독한 세상살이를 헤쳐 나갔다. 철들 무렵 무작정 서울로 상경, 건축업에 첫 발을 내딛은 후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오로지 한 길을 걷고 있다.

그렇게 시간과 경험, 기술이 켜켜이 다져져 지금의 이 황토종합건설이 자리 잡게 됐다. 이  황토종합건설은 주로 서민층을 상대로 빌라, 다세대, 아파트를 ‘시행ㆍ시공ㆍ분양’하고 있다. 이 대표는 1996년 개인 사업자에서 법인으로 회사를 전환, 건설회사로서의 입지를 더욱 넓혔다.

그 무렵 이 대표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 대표는 당시 건축할 땅을 매입하기 위해 큰돈을 소지하고 있었다. 마침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친한 지인이 급한 사유로 이 대표의 돈을 차용했다. 짧은 시간을 약속하고 돈을 빌려갔던 지인은 이 핑계, 저 핑계를 이유로 돈을 갚지 않았다.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때마침 이 대표가 발행한 어음을 막아야 할 때가 다가왔다. 그때까지 지인은 돈을 돌려주지 않았고, 이 대표는 부도라는 인생의 큰 쓰나미를 맞았다.

이 여파로 협력업체들조차 이 대표에게 미수금을 갚지 않았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도저히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큰 시련이 너무 갑작스레 예고 없이 닥친 것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이 대표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괴로운 마음에 한강 근처에서 노숙하며 밥 대신 술을 마시고 세상을 원망하며 세월을 보냈다. 자괴감에 빠져 ‘죽어야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날 문득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나” 식구들 얼굴이 스치듯 지나갔다. 뜨거운 두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식구들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야 겠다” 모든 상황을 남의 탓으로 돌렸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내 탓이구나. 어차피 힘든 상황도 내 삶이고 이 또한 내가 극복해야할 인생의 숙제구나” 이 대표가 인생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생각의 전환을 시작한 것이다.

이준호 대표는 재기의 발판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세상에 인간이 하는 일에 못할 것이 무엇이 있나” 그는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삶의 무게 앞에 당당히 맞섰다.

큰 위기를 겪은 이 대표의 인생관은 긍정적이고 강해졌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는 여유로운 마음씀씀이를 갖게 됐다. 또 그의 인생에서 나보다 더 힘든 이웃을 위한 배려가 시작됐다. 이때부터 잡일도 마다않고 힘들게 번 돈의 일부를 요양원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시절을 현명하게 버텨낸 이 대표는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즈음 이 대표에게 부천지역 재건축이라는 회생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재기의 성공을 맛 봤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들, 희망을 끈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건축업의 특성상 수많은 협력업체의 도움이 어우러져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 이 대표는 목수, 미장, 샷시, 철근, 문짝, 씽크, 전기, 도배, 레미콘, 설비, 내장목수, 등 협력업체 대표들을 모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산악회를 결성, 주기적으로 산행을 떠났다. 봄에는 꽃놀이를 즐겼고, 부부동반 해외여행도 함께했다. 이 대표는 행사에 소요되는 경비를 반 이상 지원했다. 이렇게 인적네트워크를 강화하고 결속을 다졌다. 이들과 인간적으로 소통하고 상생의 길을 도모했다.

이 대표의 진심은 통했다. 협력업체 관계자들은 그를 신뢰했고 ‘내 집을 짓는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했다. 그렇게 이 대표는 세상사는 이치를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돌보는 고아들을 지원하고 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을 겪은 만큼 어린청소년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뜻이 맞는 지인들과 힘을 모아 강서구 관내 ‘큰별장학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이 대표는 ‘강서구 호남향우회 연합회’ 부회장을 역임 했고, 현재는 등촌1동 호남향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발전을 위한 봉사활동을 비롯해 주민들과 교류하고 있다.

▲ 이준호 대표가 20년 넘게 지원하고 있는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인도네시아 수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민 살리는 ‘부동산 정책의 이원화’ 추진에 목소리 높여

지난해 대한민국은 격동의 시기를 겪으면서 부동산 정책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8.2 부동산 대책, 부동산 로드맵, ‘新 총부채상환비율(DTI)·총체적상환능력비율(DSR)’ 도입 등 부동산 거래 규제가 엄격해졌다.

이준호 대표는 40년 넘게 현장을 누비며 집을 지었다. 그야말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굶은 인물이다. 무엇보다 집을 집답게 짓는 그만의 농익은 노하우도 가졌다. 그런 이 대표가 부동산 정책에 목소리를 높였다. 주로 서민층을 상대로 빌라를 짓는 그는 현재 도입된 정책들이 서민들의 운신의 폭을 좁힌다고 말한다.

빌라를 찾는 대다수 사람들은 몇 천 안 되는 자금으로 주위의 도움과 장기 대출을 받아 어렵사리 내 집을 장만한다. 하지만 현 부동산정책에서는 대출이 까다로워지고 이자율이 높아져 이마저도 포기해야할 상황이다. 여기에 전세마저도 얼어붙어 서민 부동산 시장은 최악이라고 이 대표는 말한다.

이에 그는 주택 복지의 개념인 ‘부동산 정책의 이원화’ 추진을 강조한다. 투기 세력을 억제하는 부동산 정책은 그대로 추진하되, 3억 미만의 빌라나 다세대 등의 실소유자를 위해서는 기존의 정책을 고수하는 방법이다. 부동산 감정가 대신 현 시가를 바탕으로 대출을 산정하고 이자율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서민들이 내 집 마련하기가 수월해 지고 주거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43년 건축업에 몸담은 그가 간절하게 호소하는 외침이다.

◆“내 집을 짓는 마음”으로... 평생 흐트러지지 않는 사업철학

현재 이준호 대표는 일산 성석동에 빌라를 짓고 분양중이다. 자재관리부터 현장감독까지 총괄적인 업무를 살피고 있다. 휴일도 없고 쉬는 날도 없다. “내 집을 짓는 마음”으로 그의 사업 철학이다. 지금까지 건축업에 종사하면서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는 마음가짐이다. 한 채 짓고 마는 사업이 아닌 만큼 그의 현장 관리는 철저하다. 사람을 다루는 일부터 설계, 내장공사, 인테리어, 마감까지 어느 하나도 소홀한 점이 없다. 그의 사업철학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이곳에서 이 대표의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현장관리를 돕고 있다. 그는 아들에게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일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일하는 태도가 마땅치 않으면 가차 없다. 사업의 성패는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준호 대표는 그동안 거둔 성공의 무게만큼 사회에 환원을 계획하고 있다. 소외 이웃을 위해 개인과 법인을 구분, 매출의 1%를 기부할 예정이다. 그는 “이만큼 세상을 살아보니 ‘더불어 사는 세상’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라고 감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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