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청춘 국가에 바치고’ 이젠 봉사하며 산다

▲ 중구 을지로4가 169-5번지에 ‘자전거 무료이용 수리 센터’ 자전거 수리중인 설동춘 아저씨(62, 맨 오른쪽).

중구 을지로4가 중부시장 한쪽의 컨테이너박스에는‘자전거 무료 이용 수리 센터’라는 간판과 함께 낡은 자전거들이 가득하다.

이곳의 소장인 설동춘(62, 맨 오른쪽)씨는 주변에서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통한다.
그러나 그가 암수술 후 치료중인 환자고 흔히 가스통 아저씨로 표현되는 북파공작원 출신이란 말에 다들 깜짝 놀란다.

설씨는 51년생으로 금호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신당동에서 살고 있는 중구토박이다.

20살 때 군 입대를 기다리던 중 정보기관 물색조의 감언이설에 속아 강원도로 가 빡세게 훈련받았다.
1971년부터 다년간 강원도 오지에서 두더쥐 숨기, 맨손격투, 나무ㆍ돌로 무기 만들기 같은 특수훈련을 받고 북한을 넘나들었다.


1976년 군에서 제대했다. 북파공작원 표현대로라면 공작해고를 당하고 사회에 나왔으나 예우는커녕 당국의 감시와 간섭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렵게 직장에 들어가도 계속되는 감시에 며칠 못가 짤리기 일쑤였다.
70년대 말 중동에 가서 한몫 잡을 수 있었지만 당국의 불허로 중동 붐에 승차할 수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가게를 하거나 일용직 막노동 밖에 없었다. 리어카 채소 장사와 광부, 표구점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조국이 우리를 버렸다는 울분에 자주 주먹다짐을 벌이며 불량배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희망이 찾아온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음지에서만 지내왔던 북파공작원 출신들에게 어느 정도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 이때 그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동료들과 연락이 닿아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중구지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중구 지역에 사는 동료들과 함께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2008년 말부터 청소년 선도 봉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열심히 살고 있는데 사회적 논란이 있을 때마다 LPG통을 들고 시위를 했던 북파공작원 출신들의 예전 모습에 주민들로부터 ‘보수꼴통 가스통 아저씨’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런 부정적 이미지를 어떻게 씻어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 끝에 자전거를 생각하게 되었다. 고유가 시대에 맞춰 중고 자전거를 수리해 무료로 보급하면 왠지 가슴 뿌듯해 질 것 같았다.

당장 중고 자전거나 부품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었지만 몸으로 때우면 길이 열릴 것도 같았다. 이럴 때 강원도에서 갈고 닦은 군인정신이 도움이 됐다.

우선 중구 관내 공사장을 찾아가 고물을 수집해 팔았다. 우락부락한 인상 때문에 인근 깡패인 줄 알고 공사인부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씨의 진심을 이해한 후부터는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1주일 내내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열심히 고물을 실어 날랐고, 고물 판돈으로 자전거 부속과 장비를 구입했다. 서울 변두리 고물상에서 헌 자전거를 하나 둘씩 구입하거나 주택가, 도로변 등에 무단 방치된 폐자전거나 고장난 자전거를 절차에 따라 수거하기도 하였다.

구입하거나 수거한 헌 자전거들은 을지로4가 중부시장 인근 콘테이너 박스 한켠에서 수리했다. 녹슨 것은 깨끗이 제거한 후 광택을 입혔다.

그렇게 작업한 친환경 자전거 150대를 2009년 7월24일 중구청을 통해 저소득 주민들에게 전달했다. 기증식이 열린 날 눈물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설씨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했다.

거기서 힘을 얻은 설씨는 또 열심히 일 해 다음 해인 2010년 7월30일, 중구 각 직능단체에 친환경 자전거 180대를 무료 기증했다.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 이들은 각 학교로도 범위를 늘려 2010년 11월 장충고등학교 등 관내 6개 중, 고등학교에 친환경 자전거 총 43대를 무료로 기증하였다.

이 자전거는 각 학교 저소득자녀 학생들에게 제공되어 통학을 위한 친환경 교통수단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장충고등학교와 한양공고에서는 설씨에게 감사장을 전달하였다.

이렇게 주변에서 힘을 주자 2010년 10월 8일 꿈에 그리던 일이 벌어졌다. 사무실이 있는 중구 을지로4가 169-5번지에 ‘자전거 무료이용 수리 센터’문을 연 것.

이 센터에는 자전거 전문 수리기술을 갖춘 총 10명의 기술자들이 상주하면서 자전거 타이어 펑크, 경정비 등을 무상으로 수리해주고 있다.

타이어, 휠, 튜브 등 부품은 원가로 교체해 준다. 특히 자전거를 필요로 하는 주민이나 단체에 자전거 무료 기증도 실천하고 있다. 또한 동 주민센터 및 관내 아파트 단지를 순회하면서 일평균 30∼50대의 자전거를 무상 수리 활동도 펼치고 있다.

게다가 그동안 친환경 자전거 보급해온 노력을 인정받아 2011년부터 구청에서 예산을 지원받게 돼 더 이상 고물상을 전전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까지 설씨가 기증한 자전거만 총 1천500여대에 달한다. 기증한 곳도 동 주민 센터, 직능단체, 중ㆍ고등학교, 어린이집, 노인회, 중부시장 상인연합회 등 다양하다. 금액으로 따져도 15만원씩 계산해 2억2천5백만 원이 훌쩍 넘는 양이다.

그동안의 고생이 결실을 맺고 있지만 지난 해 7월 설씨는 식도암으로 12시간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지만 좋아하는 술도 끊는 등 건강이 예전같이 않다.

“20대 청춘을 대북 작전에 바쳤지만 남은 인생을 남을 도우며 살렵니다.
봉사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시작할 걸 그랬어요. 꼭 건강을 되찾아 수리한 자전거를 이웃 주민들에게 계속 기증할 거에요.” 설동춘씨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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