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으로 부모와 소통하며 ‘가정 복음화의 축복’을 누리자

전문 -----------------
소통의 가정 공동체[요19:25~27]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아버지, 어머니를 공경합시다.”
[서론] 요즘 들어 하루에 말을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무언가족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밤늦게 퇴근하면 입을 닫아버리는 아버지, 아버지가 퇴근하면 각자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이들, 그 사이에서 우울증에 걸릴 듯 위태로운 어머니, 이것이 이 시대 가족의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족이라는 형식적인 테두리만 가지고 있지 실제 가정 속에서 대화가 단절되고 소통이 끊긴지 오래인 붕괴 위기의 가정이 많습니다.

사실 가정은 교회와 함께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기관입니다.
가족 내의 식구들이 서로 마음 문을 열고 소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발생한 아담의 범죄 이후 사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원리대로 살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으로 공격을 합니다. 이 때문에 소통 대신 불통, 감사 대신 원망과 불평에 빠져 서로의 마음속에 수많은 상처의 비수를 꽂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실상을 보는 눈이 열릴 때 우리의 가정이 그리스도 언약 안에서 참된 소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5월은 어버이 달 일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좋은 기억도 있고 반면에 좋지 못한 감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신 분들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도 비뚤어질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육신의 아버지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영적인 아버지인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음을 닫아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지 못합니다. 대신 자신의 행위나 어떤 일의 성과를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불행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혹시

나 부모님과 부정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끼며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소통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상태에서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단지 마리아의 몸을 빌리기만 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지만 마지막까지도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원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부모 섬김의 모습을 교훈 삼아 부모와 소통하며 가정 복음화의 축복을 맛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의 부모 공경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 19:25~26) 당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향한 부모 공경을 충실히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가리켜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이 일곱 가지 말씀 중에 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부모 공경을 중요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목수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며 살았습니다. 눅 2:51을 보면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받드는 삶을 살았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호칭합니다.

우리말의 어감으로는 마치 하대하는 것 같지만 원어인 헬라어로는 ‘귀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존경하는 여인 특히 귀부인에게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마리아뿐이었습니다. 유일한 증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향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은 “어머니께서 계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서의 미션을 다할 수 있었다”는 표현인 동시에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을 당시는 동정녀였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율법상으로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습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쓴 데 이어 이후로도 헤롯의 대학살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가는 등 고초를 당했고 남편 요셉이 일찍 생을 마감하여 마리아는 예수님을 키우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게다가 장성하여 30살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위해 집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장 처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마리아는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향해 “어머니 보소서. 바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함으로써 마리아가 그동안 겪어야 했던 모든 아픔을 씻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부모를 이해하고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작가 조연경의 <효도별곡>이라는 작품의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두 분의 노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수요일 오후 3시가 되면 두 분이 함께 만두집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들어선다든가, 식탁에 마주앉아 서로 바라보는 표정 등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할아버지가 먼저 오는 편이었지만, 비나 눈이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만두를 시킨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드실 생각도 않고, 마치 이별을 앞둔 연인들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상대방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라, 아마 옛날에 서로 사랑하던 사이로서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첫 사랑의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1주일에 한 번씩 만나 젊은 시절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날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따라 할머니는 자주 눈물을 닦으며 어깨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 날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 안고 가는 할아버지. 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도, 또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보였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첫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끼리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오후3시만 되면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무엇이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위한 것인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점을 일러 주는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부모를 모시지는 않았는지 한 번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분들은 무엇보다 부모님과 소통하는 축복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불신 부모를 두신 분들은 부모님들께 더 효도하며 부모님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소통하는 축복을 맛볼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복음 안에서 귀한 영적 소통이 일어나는 가정 복음화의 응답이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새로운 가족 관계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27)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돌보신 후 제자였던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마리아의 노후를 부탁함으로써 예수님은 마지막 공경의 효도를 행하셨습니다.

이에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리아가 죽기까지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맺어주신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이라 하면 흔히 혈연으로 맺어진 경우로만 한정하여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회라는 공동체도 영적 한 가족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혈연이 아니라 성령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공동체 이상으로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정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너희들도 힘써 지키라”고 강조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완전한 소통을 이루는 소통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정은 내가 돌아가면 언제든지 받아 주는 곳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가 이런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받아 주는 복음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복음 체질이 되어 비판과 정죄의 눈이 아니라 이해와 수용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함께 공감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영적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이 교회에 오더라도 치유의 힘을 주고 새로운 시작을 하도록 하는 복음 공동체를 이루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전도자 D. L. 무디 목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 무엇보다도 그의 가족이 그가 그리스도인임을 알도록 살아야 한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 안에서 가족 구성원들을 너무 쉽게 홀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의외의 상처가 깊은 골을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부부 간에는 더욱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어떤 부부가 20년간의 결혼 생활을 되새기며 자신들의 결혼 생활은 마치 탁구를 치는 것과 같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공을 치면 상대방도 그것을 똑같이 되받아 쳐서 가정이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굳이 탁구에 비유를 하자면 상대방이 강한 드라이브 공격을 해오더라도 수비수들이 쓰는 커트 기술로 슬그머니 받아 넘기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완급 조절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부가 소통하며 주 안에서 원니스를 이루면 가족이 소통 공동체가 됩니다.
더 나아가 교회도 소통의 축복을 맛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복음적 묵상을 통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며 이해하고 수용하면 소통의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원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소통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소통의 가정 공동체, 천국 가정을 이루어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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